도올선생이 현사태에 대해 글을 쓰지 않고 있었다. 언론 및 관심있는 많은 사람은 이 사태에 대해 해외 석학의 글을 옮기기에 바빴다. 솔직히 도올선생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하는 생각은 못했지만 그가 글을 쓰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중앙일보에 수요일마다 연재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 첫번째다.
경제는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민생을 온전히 경영하는 것
미궁 속 경제 구해내려면 이념에 구애되지 말고 자유로운 상상력 발휘를
공자의 가장 탁월했던 두 제자를 꼽으라면 역시 안연(顔淵)과 자로(子路)다. 안연은 내성적이고 꼼꼼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공자의 말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공자가 안연을 평한 말에 이런 말이 있다. “저 놈은 날 도와주지 않는다. 내 말을 기뻐하지 아니 하는 적이 없으니(無所不說)!” 이에 비하면 자로는 외향적이고 과감하다. 그리고 공자와 티격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독한 실천가였다. 자로를 평한 말에 이런 재미있는 문구가 있다. “자로는 좋은 가르침을 듣고 미처 실행치 못했으면, 행여 또 다른 가르침을 들을까 두려워하였다(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어느 날 공자는 자로와 안연과 같이 한가롭게 앉아 있었다. 공자가 말했다. “제각기 인생에 품고 있는 이상이 있을 텐데 한번 말해보지 않으련?” 자로가 불쑥 말했다. “멋들어진 수레를 타고 비싼 가죽옷을 입고 친구들과 유감없이 놀고 싶습니다.” 아주 유치하게 들리는 것 같지만 지난번 대선 때 경제, 경제를 외치던 우리 국민의 소망이 모두 이러했다. 역시 자로는 자로답게 솔직하다.
다음에 안연이 말했다. “나 잘남을 자랑치 아니 하며, 남에게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無伐善, 無施勞).” 역시 안연답다. 소극적이지만 내면의 깊이가 우러나온다.
이때 자로가 불쑥 말했다. “이제 선생님 차례유. 빨리 한번 말씀해보슈.” 자로와 공자는 사제지간이라기보다는 형·동생에 가깝다. 그래서 자로의 말투는 항상 이렇다. 이에 공자는 무어라 대답했을까? 과연 인류의 4대 성인으로 소크라테스·싯다르타·예수와 함께 꼽히는, 지구상에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한 동아시아 지역에 가장 오랫동안 거대한 영향을 끼친 공자가 가슴에 품은 인생의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인류의 구원? 해탈? 이성적 완성?
“난 말이다. 소박한 꿈을 가지고 산단다. 늙은이를 편하게 해주고(老者安之), 친구를 미덥게 해주고(朋友信之), 젊은이는 품어주련다(少者懷之).”
내가 동방의 예의지국에 태어나서 오늘까지 감사하는 게 하나 있다면 공자의 이러한 상식적 감각이다. 공자 인생의 이상이란 이토록 일상적인 평범성에 있었다. 묻겠다! 과연 우리는 늙은이들이 편안하게 생각하고, 친구들이 믿고, 젊은이들이 그리워하는 그러한 지도자를 확보한 적이 있는가?
선거라는 제도 자체가 기발 나고 공상적인 홀림의 요소를 그럴듯하게 제시하는 자에게 표가 유리하게 쏠린다는 모순점을 내포하고도 있겠지만, 현 정권의 문제는 처음부터 국민의 소박한 삶의 정황을 무시하고 어떤 환상적인 공약에 매달렸다는 데 있다. 경제 발전, 연 7% 성장에 4만 달러, 대운하, 서민 주요 생활비 30% 절감 등등. 문제는 이러한 환상을 부추기기만 하고 정당한 이 민족의 앞날을 대국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언론에도 크게 책임이 있다.
왜 신자유주의자들은 달콤한 혓바닥을 계속 놀려대지 않는가? 미국의 경제가 오늘의 파국에 이르렀다면 그 낌새라도 미리 알아차렸어야 하지 않는가? 경제학도 과학인데, 과학의 임무 중의 하나가 미래 예측이 아니고 또 무엇인가?
맹자도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 했는데 경제 안정에 대한 갈망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경제가 “돈 버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이며, 그것은 민생의 전반을 온전하게 경영하고 구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제는 경제만의 논리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가 없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도 『국부론』을 말하기 전에 『도덕감정론』을 말했다.
계강자(季康子)가 도둑이 부쩍 늘어나자 그 대책을 공자에게 말했다. “어떠하면 좋겠습니까?” 공자는 잘라 말한다. “지도자인 당신이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국민은 상을 주어도 도둑질을 하지 않습니다(雖賞之, 不竊).” 맹자도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패도(覇道)로써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사회의 도덕적 기강이 확립되지 않는 한 부국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리드하는 권력의 중핵이 아직도 너무 이념화되어 있다. 부국강병의 실용주의 노선이 없는 것이다. 경제를 살린다 하면서 그들의 경제논리는 기껏해야 패망해 가는 미국 경제에의 의존밖에는 구상해 놓은 것이 없다. 그래서 쇠고기 파동 같은 추태도 생긴 것이다. 그리고 환율 높여서 미국에 수출 많이 하면 잘살게 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이 좁은 지면에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환율 조작에 쏟아부을 달러가 있다면 나는 그 돈을 차라리 북한에 투자하겠다. 이것은 농담도 아니요, 무슨 이념적 동조도 아니다. 현금의 국제 정세에서 우리가 한반도에 대한 세계의 이목을 변혁시킬 수 있는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동안 벌어놓은 것을 까먹는 행위밖에는 근본적으로 할 일이 없다. 이념에 구애되지 않는 보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는 한 우리 경제는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어 가기만 할 것이다. 매주 수요일 나는 독자를 만날 것이다.
도올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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