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새벽 2시, 밀양을 보았다.그리고 26일 새벽 2시 같은 극장 같은 시간에 또 한번 밀양을 보았다.
24일 오후에 다른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계획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밀양을 보고난 뒤 다른 영화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신애를 절망의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나서 영화는 이리저리 헤매다가 신애를 떨어뜨릴 수 없는 곳까지 계속해서 떨어뜨린다. 그 순간 영화는 개인적 절망의 끝을 관객의 상상을 모두 뒤엎어버리고 밀고 나간다. 그래서 최악의 순간이 지나가고 난 뒤의 마지만 몇 신들은 많이 헷갈리지만 이 영화 대단하다.
첫장면. 차안에서 바라보는 맑은 하늘이다. 이 장면은 나중에 전도연이 경찰차에서 바라본 하늘과 대구를 이루고 나아가 마지만 장면의 햇살비친 땅과의 또다른 대구이다.
인터뷰에서 이창동은 하늘에서 시작해서 땅으로 끝났고, 그건 신에서 인간으로의 어떤 시점의 변화라고 이야기했다.
영화는 연대기 순으로 진행된다. 단 한번의 플래시백도 없다. 다만 이야기를 통해 남편이 바람을 피웠고, 그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었으며, 신애의 아버지가 아프고, 처가집과는 거의 담을 쌓고 사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그는 가족과의 연을 끊고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내려간다. 남편과 사별했지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온 신애는 입에 행복하다는 말을 달고 다닌다. 그러던 중 아이가 납치된다. 그리고 죽은 채 발견된다. 이보다 더한 슬픔이 있을까. 신애는 가래가 나올 정도로 소리를 지르지만 숨을 쉬기가 힘들다. 그러던 중 어느 교회의 기도회에 참석한 신애는 신을 통해 그 아픔을 극복한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이상해진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유괴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최근의 많은 어린이 유괴 영화와는 달리 범인을 어떻게 잡는지 관심도 없을 뿐더러(범인은 어느 순간 잡혀있다) 그 과정도 참 짧다. 그렇게 보통의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느닷없이 하나님의 세계에 빠진다. 앞서 말한 이상한 건 그 방식이다. 보통의 영화와 다른 표현으로 이끌려오던 영화는 순간 도식적으로 흐른다. 그건 유괴 사건이 일어나기 전 신애를 전도하려는 약사에게 신애가 "에이~그런 거 안믿어요" 라고 하거나 "여기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신애가 얼마나 종교에 관심이 없는가를 알수 있다. 그러나 기도회 장면 이후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보이지 않는 걸 안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던가"라고 말하고, "정말 하나님 앞에 맹세할 수 있어요?"라고 묻는 말로부터도 느낄 수 있다. 요일마다 이루어지는 기도회에 참석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도하기도 한다. 그렇게 영화는 깨나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신애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는다. 이쯤 가면 이 영화가 도대체 무슨 영화인지 의아해진다. 내게 빠져나갈 구멍은 주지 않은 채 끝까지 밀어붙인다. 도대체 어쩔 셈인가.그런데 그 범인이 이미 하나님을 만나 눈물로 회개하여 이미 용서를 받고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영화는 또다시 내가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더 멀리 도망친다. 신애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는 슬픔과 절망을 느끼고 과거에 있었던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쳐 밀양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거기서 아들 준을 또 다시 잃는다. 더이상 희망이라고는 없는 이 때에 신애는 신을 통해 그 사랑을 다시 쏟으려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힘은 신애에게 거기까지인가 보다. 이 영화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은 했다. 그건 영화에서도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가 정말 어려운 것이 사람들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좋아해도 그 죽일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게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애는 더이상은 빠져들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의 바닥의 상태에서 땅을 파고 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신애는 미치고, 신에 대항한다. 물건을 훔치고, 기도회를 망치고, 주변의 사람을 유혹하며, "잘 보이냐고" 소리친다. 더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곳에서 신애는 손목을 긋는다. 그건 신애가 무엇을 해도 이 세상이 주는 건, 혹은 신애를 둘러싼 모든 것이 신애에게 주는 건 결국 절망과 극도의 슬픔 뿐임을 알았을 때 행하게 되는 결과이다. 내가 마음먹은 일이 10%가 아니라 단 0.0001%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한 가지의 행동이 자살일 것이며, 신에게 대항하는 최후의 수단일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신애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한다. 그리고 영화는 처음의 몇 장면과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밀양은 어떤 곳이냐는 민기의 질문에 종찬은 뭐 사람사는 곳이 다 똑같죠.한다. 신애는 머리를 자르러 간 곳에서 유괴범의 딸을 만나고 화를 내듯 나온다. 그는 아직도 신에게 대항하고 있다. 마지막 머리를 자르는 모습은 어쩌면 그녀가 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친구의 말마따나 그것은 어쩌면 체념일 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끝까지 너무도 절망적이다. 처음에 말한 신을 향하던 시선이 사람을 향한 것이라고 할 때 그 시선이 어쩌면 저항 혹은 저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아닐까.
위의 줄거리를 쓰면서 종찬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으나 어려웠다. 이 영화는 오로지 신애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두어발 뒤에 서 있던 종찬이 여러모로 신애를 도와주지만 그 노력은 언제나 수포로 끝나며 그 의도는 신애를 미처 이해하지도 못하고 주위를 맴돈다. 그래서 종찬이 마지막 거울을 들어줬을 때조차도 그건 또다른 어떤 불안함을 보여준다. 가위로 머리를 자르는 장면에서 거울에 비치는 신애의 얼굴에는 바로 목 앞에 커다란 가위를 들고 마치 목을 자르는 것처럼 보였다. 신애에게 가장 큰 절망과 슬픔은 아마도 죽음이 아니라 이러한 세상에서 그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롱테이크. 밤 중에 온 집안의 전등을 다 켜놓고 환한 집 안을 올려다보며 마치 내가 하고 있는 게 보이니? 라고 물으며 손목을 그어도 결국 뛰쳐나가 살려주세요. 제발.이라고 하는 건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다.

영화는 거의 모든 컷이 핸드헬드이다. 첫장면이 지나고부터 흔들리는 카메라를 느끼며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또한 많은 롱테으크가 있다. 하지만 핸드헬드에 카메라가 이동을 하기 때문에 그 느낌이 크지는 않다. 그럼에도 롱테이크에서 느끼는 많은 감정들이 있다. 난 두개의 컷이 계속 머리 속에 어른거리는데 하나는 어느 호수가에서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이 컷은 경찰차에서 내려 언덕배기를 엉덩방아를 찧듯 내려간 후 떨리는 걸음으로 걸어가는 컷이다. 여기서 아들은 결국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종찬처럼 따라다니던 카메라는 경찰차에서 내려 카메라 바로 앞을 지나가고 난 뒤 카메라 방향만 바뀔 뿐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경찰이 신애가 지나갈 자리를 비켜주고 신애는 차마 걷지 못한 채 컷이 끝난다. 난 감독이, 혹은 카메라가 따라가지 않는 이 장면이 너무 좋았으며, 그 감정은 슬픔이었다. 내가 신애의 가족이라면, 혹은 종찬이라면 그 옆까지 따라갔겠지만 타자의 입장에서 나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종찬이 유독 등장하지 않는 이 장면은 그래서 더욱 슬퍼진다. 또다른 하나의 롱테이크는 신애가 과일을 먹다가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는 컷이다. 그 전의 컷에서 집안의 모든 전등을 켜놓은 후 고개를 반쯤 쳐들고 과일을 먹다가 그녀가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결심하는 자살 컷이다. 끝끝내 결심을 하고 손목을 그은 후 큰 숨을 내쉬고 자신의 손목을 보자 그는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는 이야기한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나는 이 장면이 일관되지는 않지만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희망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감독은 그게 우리네 보통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살은 삶을 시위하는 것이라고. 결국 남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결국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씨네21의 이창동 인터뷰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에 대한 고민으로 보인다. 매우 평범한 보통 사람을 두고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하여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 하지만 나는 거기에 절망이라는 문제를 같이 끼워넣고 싶다. 이창동은 적어도 희망이나 사랑을 가지고 그런 문제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 절망의 문제는 고스란히 내게로 넘어온다. 적어도 내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직장생활을 하며, 일을 하며, 공부를 하며, 느끼는 어쩔 수 없는 미래의 상징이 바로 절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나라가 좀 더 나아진다면 몇년 혹은 몇 십년 후에는 희망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훨씬 많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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