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그랜토리노를 보았다. 체인즐링을 본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랜토리노라는 영화일 때는 더욱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체인즐링보다 나는 그랜토리노가 좋다. 잘 모르는 과거의 미국이야기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주인공이 여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체인즐링에서는 차가움과 냉정함의 기운을 느꼈다면 그랜토리노에서는 따뜻함과 사람의 온정을 느낄 수 있다.
그랜토리노는 월터가 가지고 있는 자동차. 72년산 포드의 자동차 이름이다. 한국전에 참가하고 포드를 다녔던 사람, 집에는 그랜토리노가 있지만 그것을 타지는 않는 폴란드 이민자 월터. 그야말로 늙은이 구닥다리 보수주의자다. 백인들은 다 떠나는 마을에 계속 남고, 이웃들은 동양인이거나 멕시코 사람들. 가족들은 한낱 사소한 이익만들 바란다. 그런 이 세상에 월터가 생각하는 건 그저 스스로 지켜왔던 그 어떤 가치를 지키며 스스로 살아가는 것. 거기에 가족조차 들어갈 자리란 없다.
그런 그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는 동네 불량배에게 당하는 옆집 동양 아이(수와 타오 모두!)를 구해준다. 이것을 인연으로 월터는 옆집 사람들에 대해, 혹은 이웃의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결국 월터는 자식보다 이웃의 동양인들이 자신을 더 이해한다고 진실을 말하게되고, 결국 갱들과의 승부다.
잠깐 언급했지만 고지식한 미국인이 동양인을 위해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가 변하는 계기는 당연히 두 동양아이를 구해준 것이지만 이른 바 말하는 선행과는 다르다.
자신의 마을에 흑인이 설쳐대는 꼴을 보지 못하는 더티해리의 마음이고, 동양인들이 자신의 땅에 들어와 싸우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것들은 다르다고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다. 이탈리언 바버, 혹은 아이리쉬 건축업자는 모두 친구. 하지만 동양인과 흑인에는 마음을 열지 못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그랜토리노를 타오에게 주는 건 결국 시간이 지나더라도 이웃에 살던 그 사람들 모두 미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토요타가 판치는 세상에 그랜토리노와 같은 사람이 내민 손을 잡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가 바로 이스트우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지막 타오가 그랜토리노를 타고가는 장면은 어색하다. 옛 영화에서만 보이던 옛 스타일의 미국 차와, 동양아이의 조화. 그 조화가 지금은 어색하지만 앞으로는 나아질거라 이스트우드는 믿는다. 그래서 마지막 컷에서 나는 그랜토리노가 지나간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ps. 이스트우드 할배가 늙었다고 그 포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손가락 총으로 사람들을 겨눌 때의 그 모습은 너무 멋지다. 멋지다 못해 환장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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