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감독을 하여 영화를 찍은 후 국제무대에서 수상한 이력도 재미있거니와 제목도 재미있어 조금 기대를 했었다. 영화는 여타의 데뷰작과는 달리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 여러모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폭력의 유전, 가족의 해체라는 둥의 단편적인 이야기만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래서 배우 출신 감독의 이 신기한 데뷰작은 대단하다. 영화 속의 현실은 영화 속만의 현실이 아닌 그야말로 서울에서의 현실이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 또한 지금의 세상과 별반 다름 없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이전의 영화에서 다루지 못한 가족의 파괴와 한 남자의 아버지 극복의 모습은 짠한 감동을 준다.
정치적 혹은 관념적인 이유로 아버지와 사이가 그닥 좋지 않은 내게 '남자'에게 아버지에 대한 존재에 대한 물음과 그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나 모습은 영화에서 주된 관심사였다. 그것이 한국영화여야만 하는 것은 당연하다.(물론 100%는 아니고.) 하지만 나는 그런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것 같다. 나나 내 친구들이 느끼는 아버지란 존재란 어떤 것이란 말인가.
똥파리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트라우마의 원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 인해 누나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5년을 복역하고 나온 아버지이지만 아들이 아버지에게 주는 것이라고는 욕설과 발길질 뿐이다. 상훈의 아버지 부수기는 그렇게 폭력적이다. 수금하러 간 어느 집에서 아내를 때리는 남자에게 너는 안맞을 것 같았지. 하지만 언젠가 맞는 날이 있다고 말하며 때리는 그 모습은 그저 폭력이라고 말할 수 없다. 거기에는 상훈의 과거가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상훈이 어린 시절 그렇게도 싫었던 아버지에게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힘을 얻기 위해 아마도 상훈은 깡패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용역 깡패로서의 삶이 상훈에게 돌려준 것은 그야말로 폭력 그 자체다. 좋은 아버지를 꿈꾸었지만 상훈은 그렇게 될 수 없다. 이복조카에게 아버지 행세를 하지만 조카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상훈은 조카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결국 조카에게 아버지를 폭행하는 장면을 들키고서 미안하다고 하는 건 폭력을 이기기 위해 폭력을 일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일 것이다.
상훈의 폭력 중 아버지에 대한 것과 다른이의 것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상훈은 그것을 동일시 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아버지나 다른 사람이나 똑같이 생각한다.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도 알다시피 가족과 관련된 폭력의 장면은 다른 장면과 사뭇 다르다. 그것이 가족이고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화가 나면 언제나 달려가는 곳도 아버지다. 결국 아버지가 스스로 손목을 긋자 자신의 피를 뽑아가라고 소리를 치는 건 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것이고, 어쨌든 더이상 남지 않은 가족이라는 깨달음이다.
그래서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은 지금껏 자신 곁에 따라다니던 폭력이라는 것을 떼어놓는 일이다. 용역 업체를 그만두겠다고 하고, 친구인 사장에게는 아마도 애인이라고 말할 연희를 소개시켜준다고 한다. 그러한 결심이 진부하기는 하지만 진심어린 것임은 분명하다.
마지막, 폭력 아래에서 자라나 폭력을 일삼고 다니며,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하던 그가 마음을 잡고 새로운 시작을 하려할 때 어디서엔가 유전된 또다른 폭력 아래 비참한 결과가 드러날 때는 그저 슬플 뿐이다. 그런 어렵고도 따뜻한 결심마저도 허용하지 않는 세상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신인감독으로서 이런 영화를 만들어놓고 다음 영화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 타란티노가 황금종려상을 탔을 때 정성일씨가 한 말이 생각났다. 쥬세페 또르나또레 처럼 이제 타란티노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몇년 후 정성일 씨는 그때 그 말을 취소했다. 타란티노는 더 나아갔다고. 그래서 기대된다. 양익준. 다음 영화 또한 대단하길 바란다.
nowadays.. these are almost about fuckin politics or economy of Korea and a few about films, travels, and my life
22 April, 2009
14 April, 2009
다큐프라임
평일에는 집에서 EBS를 주로 본다. 어제는 아프리카의 부족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그런 프로그램을 했다. 여행과 관련된 프로그램이나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다큐같은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지라 근 한 시간동안을 보았는데 그들은 아프리카의 유목민이었다. 일년에 30~40회 가량 집을 옮겨다닌다. 그러니 집이 있을리 만무하다. 1~2주간 머물 곳에서는 나무로 움막을 만들어 산다. 아프리카의 고원지대, 초원이기 때문에 나무가 많지 않아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겨우 햇볕만 가리는 정도. 고원이라 밤에는 쌀쌀해지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촬영 중 한 임산부가 아기를 낳았는데 태어난지 일주일이 넘자 이제는 다행이라며 좋아한다. 신생아 사망율이 50%라니 그럴만하다. 산모는 산후조리를 해야 하지만 모포로 겨우 나무 위를 덮어 찬바람을 조금 더 막는 것이 전부이고, 남자들은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를 위해 사냥을 나선다. 식생을 좋아하여 기생충에 쉽게 노출되고, 물은 말라버린 강바닥을 파낸 후 고여든 흙탕물을 어떤 필터링도 하지 않고 그냥 마신다. 그 물로 갓 태어난 아이를 닦는 것도, 어른들이 입던 지저분한 옷으로 그 젖은 몸을 닦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문명의 혜택을 보지 못한 이들은 그저 자연 그대로 살아간다. 그 모습이 어쩌면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과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그 모습을 보며 드는 생각이란 저들이 저렇게 살아가게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문명의 혜택을 주어야 하는가 이다. 물론 그들이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그저 어처구니 없이 목숨을 잃지 않게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작년에 알라스카의 어떤 할머니가 죽음으로 인해 하나의 언어가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래서 어느 민족의 고유한 전통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제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김연수씨의 블로그에 있는 어떤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 글은 김연수씨가 중국 연길에서 살 당시 조선족 산악회 모임을 통해 산을 등반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는 산 정상에 올라 신입회원 환영회에서 회원들이 북한의 국가와 남한의 국가를 연달아 부르는 것을 보고 기이한 경험을 한 것이다. 나도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놀라긴 했으리라. 그런데 김연수씨는 그 모습에서 민족을 떠올린 것이다. 소설가로서 쓰는 모든 소설은 분단 문학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고, 통일된 미래의 우리나라 문학에 기대감을 본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난 '민족이란 그런 것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니까 내가 아프리카 오지의 유목민들을 보며 느낀 약간의 연민, 혹은 그들은 내버려둬야 하지 않나 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그저 그들만의 생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 방송을 미국의 , 영국의, 프랑스의 흑인들이 보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그들은 내가 어렴풋이 느낀 민족의 감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지는 않았을까.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혹은 교육적으로 한민족이라고 이야기해오고 있으니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것이 어떤 느낌일런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불과 200년 전 티브이의 그 모습대로 살고 있다가 스페인의 벨기에의 네덜란드의 영국의 해군에 의해 붙잡혀 유럽으로 미국으로 간 흑인들이 바로 그들의 조상인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받을까.
그러다가 생각은 나로 돌아왔다. 저기 타슈켄트의 고려인이나 연길의 조선족을 티브이를 통해 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저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일뿐 아닐까. 그들은 우즈베키스탄의, 중국의 국민일 뿐이고, 그 흑인들은 케냐의 국민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결과가 드러나는 일을 할 수 없을 뿐이다. 이렇게 티브이를 통해서 그들을, 그들의 생활과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지 모른다. 그것이 지금은 단순한 지식일지언정 훗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그 지식으로 인해 세상을 바뀔 수 있으니까.
앞으로 사라져버릴 에스키모 언어를 그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언어를 녹음한 어느 미국인도, EBS의 프로그램 기획자도, 오지를 탐험하여 세상에 보여주는 헤어조크도 스스로의 능력을 펼친 것임에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어제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김연수씨의 블로그에 있는 어떤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 글은 김연수씨가 중국 연길에서 살 당시 조선족 산악회 모임을 통해 산을 등반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는 산 정상에 올라 신입회원 환영회에서 회원들이 북한의 국가와 남한의 국가를 연달아 부르는 것을 보고 기이한 경험을 한 것이다. 나도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놀라긴 했으리라. 그런데 김연수씨는 그 모습에서 민족을 떠올린 것이다. 소설가로서 쓰는 모든 소설은 분단 문학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고, 통일된 미래의 우리나라 문학에 기대감을 본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난 '민족이란 그런 것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니까 내가 아프리카 오지의 유목민들을 보며 느낀 약간의 연민, 혹은 그들은 내버려둬야 하지 않나 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그저 그들만의 생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 방송을 미국의 , 영국의, 프랑스의 흑인들이 보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그들은 내가 어렴풋이 느낀 민족의 감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지는 않았을까.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혹은 교육적으로 한민족이라고 이야기해오고 있으니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것이 어떤 느낌일런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불과 200년 전 티브이의 그 모습대로 살고 있다가 스페인의 벨기에의 네덜란드의 영국의 해군에 의해 붙잡혀 유럽으로 미국으로 간 흑인들이 바로 그들의 조상인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받을까.
그러다가 생각은 나로 돌아왔다. 저기 타슈켄트의 고려인이나 연길의 조선족을 티브이를 통해 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저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일뿐 아닐까. 그들은 우즈베키스탄의, 중국의 국민일 뿐이고, 그 흑인들은 케냐의 국민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결과가 드러나는 일을 할 수 없을 뿐이다. 이렇게 티브이를 통해서 그들을, 그들의 생활과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지 모른다. 그것이 지금은 단순한 지식일지언정 훗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그 지식으로 인해 세상을 바뀔 수 있으니까.
앞으로 사라져버릴 에스키모 언어를 그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언어를 녹음한 어느 미국인도, EBS의 프로그램 기획자도, 오지를 탐험하여 세상에 보여주는 헤어조크도 스스로의 능력을 펼친 것임에 분명하지 않은가.
07 April, 2009
im not serious like that.

really depressed today.
i dont know why. maybe because i posted something before today.
saying or writing is difficult, sometimes as im saying i realize whats my thought at the same time. but you know. thats the life... untouchable inevitable thing.
alright.. memory has the limit and im gonna wake up weary tomorrow morning like always the same day.
욕심

'greedy' photo by Flidais/flickr
젊어서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괜한 이야기가 아니다. 대학 4년과 대학원 2년간 공부를 했지만 그 전공에 대한 공부와 더불어 다양한 공부를 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젊어서 많이 편협했다. 이제와 세상돌아가는 꼴을 보니 너무나도 모르는 것이 많다.
지금 이순간 너가 잘 아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대학원 전공, 요즘 회사일, 영화 정도..
요즘 관심많은 정치니 경제니 역사니 음악이니 하는 것들은 인터넷으로 지금껏 관심을 가져왔던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간단히 이래저래라고 말을 할 수는 있을 지언정 왜, 왜, 왜, 이렇게 3번 물고 늘어지면 곧 바닥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하려고하니 이제는 시간이 없다. 물론 나약한 합리화라고 말을 해도 어쩔수는 없지만 평일에는 하루종일 회사에서 정신없이 보내고, 밤늦게 들어가 씻고 잠자기 바쁘며, 주말에는 청소에 세차에 이런 저런 일도 많고 종종 가족사에 참여하다보면 그렇게 한달 두달이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작년말에 사놓은 책도 다 못읽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집들이에 갔다가 브로콜리너마저와 윈터플레이라는 국내밴드를 알게되었고, 어제 CD로 MP3로 구입을 했다. 퇴근 길에 메모리에 넣고 차에서 들었는데 2곡을 듣자 집앞에 도착했다. 음악도 앨범하나 집중해서 듣는 것이 힘든 나날이다. 하물며 영화와 책은 어떠하겠는가.
이런 것이 루틴이고 매너리즘 아닐까? 매일하는 영어공부도 이제는 대충 대충 스킵하기 일쑤다.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젊었을 때도 공부를 더 해야하고, 회사를 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과거지사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현재나 미래의 상황도 극복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건 분명하다. 내가 내 삶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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