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생각하고 산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생활을 돌이켜보면 내게 생각할 때라고는 괜찮은 책, 읽을거리, 뉴스, 영화를 볼 때인 것 같다. 그런데 인터넷을 이용한 읽을거리를 제외하고는 그럴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 첫째 문제다. 둘째는 가끔 일어나는 뉴스, 책, 영화를 보고선 생각을 잘 못하게 될 때도 있다. 그건 너무 가끔인 상황에 익숙치가 않아 그저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가장 쉽게 접하는 읽을거리도 문제다. 몇년 전부터 RSS feed를 이용해 몇몇 블로그와 신문등을 보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구독 숫자가 늘어,(게다가 구글 리더에서 지원하는 추천피드는 하루에 백여개가 넘는 것 같다) 생각할 시간 없이 그저 눈으로만 따라가기에 바쁜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결국 이런 정보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찾느냐 보다는 얼마나 중요한 정보를 얻느냐가 더 큰 관건이 된다. 그리고 그건 마치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같은 마음으로 집의 물건을 버리듯이 수많은 구독 리스트를 삭제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더욱 편하고 더욱 새로운 기술은 스스로를 관리하는 기술을 알려주지 않는다. 기술이란 자본주의의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발전하고 최첨단으로 나아가도 개인의 정신을 함양하고 정진하는 건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다.
지난 주에는 옥희의 영화와 엉클분미를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를 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하나의 이정표가 될만한 건 앞으로 영화에 대해 글을 잘 쓰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데 있어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참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보고 난 다음에 그것을 말과 글로 옮김에 있어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건 고스란히 나자신을 향한 글이어야 한다.(아마 거의 아무도 보지는 않았겠지만)
옥희는 마지막에 반복과 차이를 영화로 옮겨보고 싶었고, 결국 영화로 만들었으나 관객인 나는 그 차이와 반복을 고스란히 관객의 입장에서 보기만 했지 그로 인한 그 무엇도 느끼기 힘들었다. 이선균이 결혼한 후에 옥희가 살았던 곳에서 살고있고, 송교수 또한 학교에서 혹은 아차산에서 수없이 차이와 반복을 경험하지만 그들은 나와 같을 뿐이다. 그 차이와 반복이 내게는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그 누구나 생활이 차이와 반복인데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감동을 느끼는 것일까. 이야기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기로 했다. 옥희가 화장실 앞에서 송교수를 보고 화장실에 왜 들어갔을까, 혹은 화장실에서 무엇을 했을까.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송교수일텐데 영화를 찍은 시점은 누구랑 만나고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지 않을까. 무미 건조하게 나레이션하는 그 목소리처럼 아마도 나의 일상 속 차이와 반복은 건조할지도 모른다.
결혼 후에는 확실히 차이보다는 반복의 비율이 많아졌다. 그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목표가 멀어지는 것이다. 아핏차퐁 영화를 보고, 정성일씨의 글을 읽으면서 하고 싶은게 생겼지만 언제 이룰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건 개인적인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이고, 새로운 가족이라는 사회에 들어가며 지켜야 하는 약속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울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청춘이 좋다는 것이고 그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 불과 서른 중반에 나의 가능성은 대부분 사라졌다. 대신 하나의 명제가 드러났다. 젊은, 혹은 어린 누군가 결혼을 빨리 해야 하는가 늦게 해야 하는가를 물어본다면 그건 사람 나름이라고 대답하기 보다는 늦게 해야 한다 가 확고한 나의 대답이 되었다는 것.(아마 또 다른 것도 있을 듯 싶기는 하다)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영화를 찍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그것이 이제 더이상 영화를 찍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부족하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상황이다. 나는 아직 세상을 끌어안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혹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 자신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남을 끌어안을 수 있다. 가까운 친구와 가족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다. 아마도 이 명제가 거짓이지 않는 한 내가 찍을 수 있는 영화는 아무리 잘해도 겉만 번드르한 영화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우울한 현재 진행형의 삶에서 그나마 희망 비슷한 것을 찾자면 다짐이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해이한 마음가짐에 더 단단한 자물쇠를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나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명제의 다른 버젼. 내가 변해야 자식이 변한다. 그래야 세상이 변한다. 그것을 이제는 믿으므로 새로운 가족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또 다르게 생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조금씩 바뀌기. 또 다시 돌아간 차이와 반복. 세상을 끌어안을 만한 사람이 아닌 내게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된다는 희망. 아까와는 반대로 그 속에 감동이 언젠가는 있을 것이라는 상상.
그건 오로지 스스로의 거짓없는 노력이다.